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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시인의 눈, 화가의 손 (3) :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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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국 댓글 0건 조회 3,350회 작성일 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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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눈, 화가의 손 (3)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 | 대신학교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근대시를 완성하고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인물입니다. 그는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심오하고 완벽한 시를 생의 만년까지 진력하여 길어냈습니다. 릴케는 다른 이름이 아닌, 오직 시인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궁핍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으로 사는 것은 그에게 소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시인이고자 했던 태도와 시가 지닌 빼어난 서정성과 초월적 주제들 때문에, 일상에 대해서 가졌던 그의 통찰과 식견은 종종 과소평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물시’를 보면, 그가 선입관 없이 얼마나 날카롭게 대상들을 바라보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엄정한 시선은 근대 이후의 인간 소외와 정신적 위기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파리에 생긴 동물원이라는 ‘근대적 장소’에 갇혀있는 표범을 묘사한 유명한 시 <표범> Der Panther이 좋은 예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시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위대한 산문 『말테의 수기』가 대표적입니다. 


릴케는 위대한 시와 뛰어난 산문을 많이 남겼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아름답고 따뜻한 편지들 때문입니다. 그는 참으로 인생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또한 자기 내면에 있는 고귀한 가능성을 꽃피우는 것은 인간에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과, 지치고 소외된 상태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때로는 고독의 힘으로, 때로는 사람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안주하거나 고착된 삶이 아니라 도전에 응답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갈 것을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양되고 변화하며 회복하는 삶은 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시인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가 보낸 편지에 릴케는 다정다감하면서도 확고한 답장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답장들을 모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는 일상에서 변화의 기회를 발견하도록 촉구하는 릴케의 열정적 목소리를 전해줍니다.


“당신 자신의 일상생활이라는 주제로 돌아가십시오. (…) 만약 당신의 일상이 가난하게 여겨진다면, 그 일상을 비난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비난하십시오. 아직은 참다운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풍요를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가난이라는 것도, 가난하고 하잘것없는 생활의 장소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 먼 과거의 가라앉아버린 감동을 되살리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의 개성은 확고해지고, 당신의 고독은 폭을 더해 차츰 밝아가는 하나의 거주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소음에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매일의 삶 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길을 제시한 묵상서 『일상』 (분도출판사, 2003)에서 릴케의 권고를 인용합니다. 자기 일상의 신비를 느끼고 회복과 변화와 초월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 이는 예술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소명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깊어진 가을에 릴케를 읽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회복을 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비처럼 내리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새삼 감지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나의 회복, 나의 변화는 세상 변화의 시작이라고 희망하며 오랜만에 에릭 클랩튼의 명곡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Change the World의 실황을 감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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