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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느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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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국 댓글 0건 조회 3,750회 작성일 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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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시간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 | 대신학교


여름과 작별하는 8월의 끝자락에 어울리는 책으로 미카엘 엔데의 『모모』 (비룡소, 2017)가 떠오릅니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지만 다시 읽어도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는, 모든 세대에게 위안을 주는 오늘날 고전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살짝 나른한 시간을 보내는 여름날 오후 이 책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답답하거나 초조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야 하는 일들의 압박 속에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자신을 힘들게 했음을 깨닫고, 비로소 ‘느림의 시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름은 우리의 욕심만큼 많은 일을 하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불만과 불안, 짜증과 아쉬움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름의 끝에 와서야 알게 됩니다. 계획대로 알뜰하게 ‘사용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느림의 시간’에 인생의 참 의미가 담겨있다는 진리를 말이죠. 『모모』에 나오는 주인공 ‘모모’와 거북이 ‘카시오페아’ 그리고 ‘시간의 꽃’을 돌보는 신비한 ‘호라’ 박사는 ‘느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는 좋은 친구라 하겠습니다. 미카엘 엔데는 소설 속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삶을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까.” 


소설에서 모모를 미워하고 위협하는 회색의 시간 도둑들은 사람들 마음을 교묘히 파고 들어가 ‘시간은 귀중한 것, 잃어버리지 말라! 시간은 돈과 같다. 그러니 절약하라! 시간을 아껴라, 그러면 미래가 보인다!’ 같은 구호로 위협합니다. 그 결과, 일의 성과와 돈에만 집착하여 우정과 사랑이 깃든 일상은 사라지고, 여가조차도 진정한 휴식과 느긋한 즐거움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축제가 아니라 떠들썩하고 자신을 잊게 하는 강렬한 오락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삶은 빈곤해지고 차가워지고 획일화된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이는 단지 소설 속 풍경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이자 유혹입니다. 그러나 느림이 뿌리내리지 않은 시간 속에 살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느림은 사회적 압박에 따라 획일적으로 강요되는 시간 속에서 자유를 얻은 각 개인의 고유한 시간, 마음의 움직임을 담을 수 있는 시간, 소비가 아니라 향유가 가능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느림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향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름에 계획했다 이루지 못한 일들에 연연하고 자책하기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느림이 나의 마음에 조용히 전해주는 리듬을 감지하는 여름의 끝이기를 희망해봅니다. 


아름다운 여름의 마감을 위해 더없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품이 있습니다. 유난히 여름에 자주 생각나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 클로드 드뷔시의 ‘렌토보다 느리게’ La plus que lente입니다. 느긋함과 영롱함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곡인데, ‘느림의 시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들려주는 우아한 연주 영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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